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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상식

프로젝트 모더니즘

by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2013. 12. 18.

“프로젝트 모더니즘”—모더니즘 완성을 위한 근대의 수정

 

이 강의의 첫 부분은 ‘현실에 대한 탐구’로서의 철학을 다룬다. 현실의 문제 역시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세계지」라는 철학함의 한 양식으로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현실의 문제에 대해 철학이 하는 일은 오로지 현실을 개념적으로 견고히 하는 일이다. 이 강의에서는 베이콘과 신과학(학문), 갈릴레이와 자연(철학), 비코와 과학으로서의 역사라는 세 가지 테마를 가지고 근대의 「신과학 프로젝트」를 다루어 보기로 한다. 물론 여기에는 중요한 한 가지 테마 ‘인간’이 빠져 있다.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인간을 자유의 영역에 세움으로써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칸트 시대에 와서 이간의 본질 탐구는 <인간학>이라는 하나의 영역을 형성하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별도로 길게 논의하기로 한다.

하고 많은 근대의 과학자와 철학자, 그 이론과 주장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이 세 가지 테마를 선택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근대의 과학과 자연철학, 그리고 역사를 빼놓고는 「현실의 실천적인 문제」를 생각할 수 없다. 현실의 모든 문제는 근대세계의 세 가지 테마에서 비롯되었고, 현대의 위기는 바로 근대과학의 위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늘의 위기상황을 진단하면서 ‘과학과 기술진보의 불일치’, ‘환경위기’, 혹은 ‘지향점을 잃은 의식의 위기’, 나아가서 ‘학문의 후기적 증세’를 걱정한다. 이런 위기의식은 이미 근세의 과학, 자연, 역사 개념과 그 실천적 적용에 문제가 있었음을 자각하고 하는 말이다. 완전히 ‘새로운’ 사고로 이 문제에 접근하지 않고, 현실에 대한 언어적-개념적 표현만으로는 결코 소위 「현대의 위기」는 구체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항상 낡은 사고구조와 낡은 개념을 가지고 문제의 해결가능성을 타진해 왔다. 그것은 문제를 해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도 근대 이후의 무수한 좌절한 시도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우선 우리 스스로가 과학, 자연, 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해 보자. 개인들이 각각 어떤 일정한 「역사적 조망」 없이 무엇을 연구하는 일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태가 상투적이고, 필연적인 양식으로서가 아니라, 전혀 독특한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경우,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역사적 조망을 가지고 사태가 어떻게 진척되어 왔는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조망이라는 말은 사태를 파악하고, 규정하고, 예측하는데 필요한 인간의 인식능력을 담아두는 그릇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 <역사적 조망>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3 가지 테마의 상호연관성을 보여주고, 동시대, 동일한 영역에서의 사고지표—인식의 이정표—제시해 준다.

오늘날 우리가 어떤 문제를 풀 때 활용하는 사고방식은 분명 <근세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대체로 말해 1550년에서 1750년 사이에 형성되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400년 혹은 500년 전의 사고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이미 「현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현대>라고 번역되는 <모더니즘>은 19세기 중엽, 다시 말하면 보들레르 (Baudelaire)부터 시작되는 예술사조로서의 「모더니즘」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영어의 모더니티 (Modernity), 즉 새 시대를 의미하며, 모더니즘적인 사고방식, 생활방식은 또한 르네상스 이후 등장한 「시민」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논의를 전개해 가기로 하자. 아울러 근대에 기원을 두고 있는 이런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표현양식은 금세기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접근방식의 수정은 이제 불가피하다. 현실의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역사적 조망의 수정」은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하버마스가 이미 한번 시도했듯이, 우리는 「프로젝트: 모더니즘」을 가지고 이러한 수정을 시작해 보기로 하자. 근대는 역사의 한 시기에 우연하게 시작된 게 아니라, 많은 선지자들, 예언자들에 의해 시도되어 왔던 정신이 어떤 계기에—그것을 르네상스라고 해도 놓고, 종교개혁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하나의 특정한 사회운동이 계기가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의해 구체화된 것이다. 근대적인 경험과 삶의 양식, 특히 근대적인 문제에 대한 언어적-개념적 표현 [철학]은 파악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이미 역사적으로 된 인간으로 이해할 경우, 현대의 조건에 문제가 있음을 경험하고, 그렇게 파악되면, 그것은 우리는 자신의 역사적 변화과정 [역사적 조망의 변화과정]을 수정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해결가능한 문제만 문제 삼기 때문이다.” 이 말은 맑스의 말이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수정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플라톤 철학과 더불어 완성된 철학의 첫 출발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플라톤의 이데아설의 영향은 우리가 「근대」라는 테마로 파악하는 것 전부를 포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 이전으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정해야할 시간대를 멀리 잡으면 잡을수록 이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은 적어진다. 보다 가까운 데에서 즉, 현대의 문제가 근대로 부터 시작된 문제라는 관점으로 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모든 역사적 시기와는 달리 「근대」에 와서 비로소 인간과 인간의 발전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개념적 작업 [철학]을 통해 현실(Wirklichkeit)을 변경하고, 수정하는 기회는 현실 그 자체가 「현대의 위기」라는 문제와 일치할 때 가능하다.

우리가 다루는 세 가지 테마를 「프로젝트: 모더니즘」이라 부르자. 각각의 테마들을 다루기 전에, 이 세 가지 테마가 현대의 위기를 처방하기 위한 「모더니즘 프로젝트」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밝히고,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가 이로써 해소될 수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혼란만 가져다 줄 것인지 검토해 보자. 「프로젝트: 모더니즘」은 철학적으로 보아 현대의 수정인 동시에 현대의 완성이다.

근대는 아메리카의 발견, 천문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혹은 종교개혁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프로젝트: 모더니즘」은 당연히 이런 근대의 귀결들을 전제하고 있다. 이런 귀결들은 인간의 피나는 투쟁과 부단한 저항의 산물인 동시에 또 어떤 의미에서는 우연의 일치로 볼 수 도 있다. 세계는 근대와 더불어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변화의 의지에 불을 붙였다. 코페르니쿠스, 콜럼부스, 루터는 변화를 이끌어낸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변화를 예상한 사람들의 장기적인 프로그람에 따라 움직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종교 내에서의 개혁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꿀’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거대한 근대의 프로그람은 과학, 자연, 인간과 역사의 문제에 관련된다. 아래에서 우리는 「프로젝트: 모더니즘」을 이러한 3 가지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I. 신과학 프로그람: 프란시스 베이콘


베이콘(Francis Bacon)은 1561년부터 1626년 까지 살았다. 엘리트 대학 케임브리지대학을 다녔고, 정치에 입문하여 끊임없이 정치권력과 야합하고, 45세에 대단히 호화로운 결혼을 하고, 뇌물 수수혐의로 관직에서 쫓겨났고, 처벌을 받고, 그의 아버지가 누렸던 기득권을 계속 누리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궁내부 장관을 지냈다. 자신의 오만한 기질을 발휘하여 정치와 과학에 관한 글을 썼다. 그는 특히 탁월한 문장력을 지녔었다.

근대의 신과학은 베룰람의 백작 프란시스 베이콘과 더불어 시작된다. 갈릴레이의 낙하법칙이라든가, 코페르니쿠스의 천동설 등 근대과학을 중세적인 것으로 부터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인식이며, 새로운 발견에 근거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베이콘이 이런 개별적인 발견과 새로운 인식을 내놓은 건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새로운 과학지식의 탐구방법을 발견했다는데 있다. 즉 베이콘에 와서 비로소 과학이 하나의 ‘탐구 프로그람’으로 되었다는 점이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지식은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의 체계적인 결집으로서 결코 수정되거나 마음대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완벽한 경전으로 이해되었다. 당시 지식을 가진 자는 바로 학자를 의미했으며, 학자는 지식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논리학의 도움을 받아 논증하고, 결론을 끌어내는 사람으로 이해되었다. 베이콘에 의해서 과학은 하나의 연구, 혹은 탐구가 되었다.

이 말은 지식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에서 규정되고, 학자의 연구를 통해 부단히 확대되고, 혁명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무엇으로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지식해석에 의하면 과학자는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학자도 아니다. 단지 지식의 진보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 사람으로 이해될 뿐이다. 베이콘에게 지식은 도구이고 기관이다. 이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자신의 발견의 방법을 대립시키고 있다. 그는 논쟁하고, 결론내리고 하는 것이 학자의 일이 아니다. 발견하고, 탐구하는 것: 그것이 베이콘이 시도하는 신과학의 프로그람이다.

베이콘은 중세시기의 나침판, 화약, 망원경 등의 발명도 이미 결정적인 발견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메타적인 혹은 반성적인 차원에서의 자신의 발견을 뽐내고 있는데, 그것은 발명을 위한 ‘방법의 발견’이라할 수 있다. 베이콘은 “모든 것을 쉽게 발명할 수 있는 무엇을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베이콘의 신과학 프로그람의 첫 번째 특징은, 지식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학은 더 이상 스콜라적인 논쟁이 아니라, 하나의 실제적인 탐구이며, 끊임없는 혁신을 지향하게 된다.

베이콘의 프로그람의 두 번째 특징은 과학의 사회화이고, 세 번째 특징은 지식의 유용성의 문제이다. 별로 많은 저작을 내놓지 않은 베이콘이지만, 자신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지배자에게 신과학을 장려하는 정치를 펴도록 충고하는 글을 썼다. 그런 의미에서 그를 신과학의 이데올로그 혹은 선동가라고 이름붙일 수 있겠다. 실제적으로 생존시기에 신과학 부흥에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프로그람을 이상 국가 「신아틀란티스」에서 펼친다. 「신 아틀란티스」에 세워진 “살로몬의 집”에는 모든 과학 분야가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이 “살로몬의 집”에서 베이콘은 정치적 지배가 없고, 각각의 과학자가 자유로이 공공의 복지를 위해 연구하는 새로운 모델을 전개하고 있다. “살로몬의 집”에는 과학자들은 학문분야가 아니라, 사회적인 유용성에 따라, 즉 적용영역에 따라 설치된 많은 실험-연구실이 있다. 이를테면 기후실험실, 양봉실험실, 광학실험실 등. 또 “살로몬의 집”은 지식을 수집하고, 전수, 전파하는 역할도 한다. 이는 사회의 제 영역에 지식의 공백을 메우고, 지식의 대중화 역할을 한다. 지진이나, 홍수, 가뭄 등 기상이변을 예언하고, 공중위생에 기여하기도 한다.

유토피아적인 전설의 섬 「아틀란티스」에 세워진 “살로몬의 집”은 무엇보다도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통해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는 베이콘의 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베이콘은 “너희들은 대지를 지배하라” [노붐 오르가논, 129]는 창조의 계율을 만들어 낸다. 인간의 자연지배는 자연에 대한 지식의 진보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노붐 오르가논, 129]. 베이콘의 유명한 구절을 다시 한 번 인용해 보자: “원인을 알지 못하면, 그 작용과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무엇을 안다는 것과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동일한 의미이다. 자연을 복종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 이론에서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실천에서는 행위준칙이 된다.”

신기관에 나오는 이 세 번째 경구로 베이콘이 말하고자한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에 대립한다는 의미가 아니라—역학의 고전적인 해석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자연적인 인과관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으로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유용하게’ 활용한다는 의미이다. 이는—자연현상이나, 사태의—원인에 대한 지식을 실천적인 행위준칙에, 즉 기술적인 절차에 환원시키기 위함이다. 베이콘이 그의 이상적인 프로그람을 실현하기 위해 쓴 뉴아틀란티스에서 주장하는 결정적인 사실은 그가 소위 인식론적 통찰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인 필요에 따라 자연에 대한 지식을 전수하고, 이를 매개할 수 있는 사회적 관습이나 제도를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그는 과학적 지식을 정치나 경제처럼 하나의 사회적 요소로 만들었으며, 탐구로서의 과학(학문)이 공중의 삶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게 했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위에 살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베이콘을 「모더니즘의 프로젝트」를 수행한 저자들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프로젝트」 수행한 베이콘이 크롬웰이나, 당대의 다른 모든 개혁가들과 구분되는 점은 인간의 진보는 정치적 개혁이나 교육개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의해 달성된다고 주장한 데 있다. 그 역시 이 점을 알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신기관 「1권」의 129 경구를 인용해보자: “발명가의 선행은 전 인류에게 미치지만, 정치적인 선행은 단지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그리고 이는—정치적인 선행—일시적일 뿐인데 비해 과학적 발견은 영원하다.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정황변화는 폭력과 소요를 통해 오지만, 발견의 경우는 타인에게 불법을 저지르거나, 슬프게 하지 않고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베이콘은 확실히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사회관계와 인간관계를 진보 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베이콘의 「신과학 프로그람」은 과학을 사회화하고, 과학의 유용성이라는 관점에서 수행되었지만, 그의 이런 기대와 희망은 충족되지 못했다는 사실로써 우리는 오늘날 과학이 처한 위기상태를 규정하고 진단할 수 있다.

 

II. 자연철학과 물리학: 갈릴레이와 데카르트


“자연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대상으로서의 자연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자연은 인간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혹은 “자연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라는 물음으로 된다. 「자연」이라는 테마는 「섹스」 와 더불어 일상생활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상징적인 개념이다. 텔레비젼 상품광고를 보면 이를 잘 알수 있다. 자연스러운 것, 자연의 아름다움, 자연의 위대함을 상품의 질과 신뢰도에 연결지우는 광고전략을 거의 매일 대한다. 정치에서도 「자연」은 요즈음 매우 환영받는 주제이다. 자연, 환경, 생태계, 자원보호 등의 이름으로 정치적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자연」을 하나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이념과 표상에 근거하고 있다. 즉 우리에게 한편의 그림으로 보여지는 자연, 자연과학의 탐구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한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전에 「자연(自然)」이라는 개념부터 분명히 하고 시작하자: 현대 유럽 언어에서 자연이라는 단어는 묘한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 「자연」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두 갈래로 나뉘어 진다. 하나는 희랍어원이고, 다른 하나는 라틴어원이다. 희랍 사람들은 「자연」을 퓌시스(physis)로 불렀고, 영어의 nature, 독일어의 Natur, 불어의 nature는 전부 라틴어의 natura에서 왔다. natura는 원래 탄생, 생성을 의미하는 단어 natio, 혹은 nasci (혹은 nascor)에서 왔다. 희랍어의 퓌시스 physis에 해당하는 자연은 생기, 출현을 의미하고, 이는 싹튼다, 나타나다는 의미의 phyein에서 왔고, 라틴어로 자연에 해당하는 natura는 nasci에서 파생되었으며, 태어난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소피스트 이래로 자연이라는 말은 그것이 physis로부터 왔건 natura로부터 왔건 간에 인간에 대립되고, 인간의 영역밖에 있는 대상으로 이해되었다. 인간적인 소여(所與), 말하자면 ‘기술’과 ‘문명’에 대립되는 무엇으로 이해했다. 마치 이성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소여라고 생각했듯이, 그 속에 아무런 자연적인 소여도 갖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에 있어서만 자연은 “존재자 전체”를 의미했다. 서양 철학사에서 ‘자연’을 맨 먼저 이야기 한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자연은 자신을 숨기기를 좋아한다”는 헤라클리트(Herakleitos)로 부터이다. 같은 시대를 살던 중국 사람들도 놀랍게도 똑같이 생각했다. “자연은 말이 없고, 함이 없다(希言自然, 老子, § 23)”이라 하지 않았던가!

다시 본래 문제로 돌아가서 지배하고 복종시켜야 할 대상으로서의 자연개념은 베이콘의 과학의 유용성이라는 프로그람에서도 이미 암시되었다. 베이콘은 “대지를 지배하라”는 성서의 계율을 과학 -과학적 지식- 으로 잃어버린 자연 지배를 회복하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그렇게 과격한 자연 지배를 주장하지 않는다. 베이콘이 생각한 것은 ‘자연을 인간에게 순종(gehorchen)하도록 함으로써 우리는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 이 문장에서 보듯이 ‘지배’가 문제가 아니라, 순종하게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갈릴레이와 데카르트에 와서 「자연지배」는 보다 철저하게 시도된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피사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를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로 부른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체계가 옳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한 사람이다. 그는 또 「관성의 법칙」과 「낙하법칙」으로 유명하다. 갈릴레이는 1616년에 베네딕트 교회의 카스텔리에게 편지를 보내 천동설을 비롯한 성서와 자연인식 사이의 모순에 대한 견해를 요구한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교회와의 대규모 논쟁으로 까지 확대된다. 1616년에 교회에 의해 공표된 금지사항을—그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천동설이다—어긴 죄로 1632년에는 로마에서 열린 종교재판에 소환된다. 1633년 6월 22일 그는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가톨릭교회에 충성할 것을 서약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구절, “그래도 지구는 태양주의를 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해 말 그는 어느 조그만 빌라에 연금되어 여생을 보낸다. 그러던 중 그는 장님이 된다(1637년부터). 몇 년 후 실낙원을 쓴 밀턴이 찾아가 보았더니 장님이 되어 있더란다. 갈릴레이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문학작품으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면 베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갈릴레이의 생애(1939) 라든가, 보오드(M. Bord)의 소설 갈릴레이 감옥에 가다(1948) 등. 그는 1642년에 죽었는데 교황의 명령은 그의 비명에 「교회를 더럽혔다」는 문구 이외에 어떤 것도 넣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자, 나는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고전 역학>의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무게가 다른 두 물체를 떨어뜨리면 어느 것이 빨리 떨어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물체가 빨리 떨어진다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cquinas)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좇아 그렇다고 했다. 아퀴나스 이후 몇몇 사람들이 이 역학법칙에 도전했다. 쟝 뷰리당(Jean Buridan)과 니꼴 드 오램(Nicholas de Oresme) 등은 무게가 같지 않은 물체라도 같은 속도로 낙하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보다 빨리 1335년경에 이미 옥스퍼드의 머틴학파에 의해 이런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최근의 연구도 나왔다. 하지만 17세기 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정설(定說)을 무너뜨린 사람이 바로 갈릴레오라는 것이다.

그는 무게가 서로 다른 두개의 포환을 들고 피사 사원탑에 올라가 떨어뜨려 그것이 동시에 땅에 닿는 것을 증명해 냈다고 한다. — 애석하게도 그가 정말 그랬는지는 증거가 없지만 ······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낙체 부등비율설(落體不等比率說)은 이처럼 무게가 다른 두 물체를 떨어뜨리기만 하면 뒤집히는 뻔한 허구였지만, 천년 이상 동안 반박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은 과학의, 혹은 인간의 과학에 대한 믿음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러면 왜 그토록 오랫동안 이 낙체 부등비율설이 지지되었을까? 한마디로 대답하면 순간을 잴 수 있는 시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릴레오는 짧은 시간을 측정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코페르니쿠스도, 케플러도, 금방 살펴보았던 베이콘도 모두 위대한 과학자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이론적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교육에 호소하고, 귀족과 상류 사회의 관심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정신을 구체화시키고자 했다. 갈릴레오는 달랐다. 무게가 다른 물체는 떨어지는 시간도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보다 정밀한 실험을 직접 시도한다. 이런 불굴의 연구태도가 그를 동시대인과 구별하고,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과학자로, 과학에 경험적 연구를 도입한 최초의 사람으로 칭송하는 게 아닐까?

갈릴레이가 태어난 1564년에는 이 지구상에 시간을 재는 시계가 없었다. 중세 때의 시계는 주로 수도원에서 사용되었는데, 정확한 시간을 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루의 기도시간을 등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간격은 잴 수 있으나, 시간의 흐름은 잴 수 없었다. 갈릴레이는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피사(Pisa) 사원탑에 램프가 흔들리는 것에 관심을 가진 것은 스무 살도 안 된 때였다. 그는 어떻게 이 흔들림의 규칙성을 잴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맥박을 재서 그것과 램프의 흔들림이 일치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을 알아낸다. (추가 길든 짧든 상관없다는 것도 발견한다) 오늘날 모든 시계는 일단 이 원리로 부터 나왔다. 물론 정확한 시간을 잰다는 생각은 갈릴레이가 최초가 아니라, 그 보다 100년 전에 다빈치가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갈릴레이가 진자의 운동을 수학공식으로 증명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또 100년이 지난 다음에 크리스찬 호이헨스 (Christian Huygens)이다. 문제는 누가 생각해 냈고, 누가 증명해 냈느냐가 아니다. 더욱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은 직접 실험을 했다는 사실, 실험을 토대로 이론에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갈릴레이에 와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변화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이 사람과 더불어 역학은 고전적인 자연과학의 원형이 된다. 고대의 역학,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개념에 의하면, 자연은 외적이고, 스스로 성취될 수 있는 무엇이었던 반면, 갈릴레이에 와서 역학은 자연을 이해하고 그 본질을 파악하는 자연철학자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자의 탐구대상으로 된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더 이상 ‘저 밖에 있는 무엇’으로 부터 얻는 자연의 작용에서 보다 더욱 분명하고 명쾌한 기술적인 자연이다. 갈릴레이는 자연을 ‘합법칙적인’ 것으로 본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고대의 기술과 자연의 대립은 해소되고, 근대 자연과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과학과 기술의 관계가 가까워진다. 갈릴레이에 의하면 과학은 주어진 것, 소여가 아니다. 그것은 법칙적인 가능성이다.

데카르트는 베이콘이 발견한 과학적 방법론과 갈릴레이의 자연개념을 종합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분석과 종합의 방법을 인식에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 즉 발견하는 정신에로 나아가는 법칙(Regulae ad direchtionem ingenii)이라고 보았다. 데카르트로 인해 유럽의 과학에 있어서 인식은 근본적으로 재구성적 인식으로 되었다. 즉 대상을 분석적으로 잘게 나누고, 이렇게 세분된 정보들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한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인식유형을 다시 하나의 연구테마로 제시하는데, 그것은 이미 베이콘의 신학문 프로그람과는 다른 자연의 이념을 제시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자연을 이해하되, 기능공이 하듯이 그런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18세기의 ‘자연의 기술(Technik der Natur)’ 이라는 경탄에로 이끌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식하는 것과 인식을 통해 만들어진 것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즉 어떤 자연물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 (재현)낼 수 있는가를 알 때, 비로소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근대의 「자연」개념은 데카르트가 실체를 ‘연장하는 것(res extansa)’과 ‘생각하는 것(res cogitans)’의 구분함으로써—심지어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 (자연)인—육체까지도 마찬가지로 연장하는 실체로 파악됨으로써 극단적으로 나아간다. 이런 해석으로 이제 인간은 자연에 대한 배려를 잊어버려도 좋게 되었다. 자연도 감정이나 영혼이 스며들어 있다고 보고, 자연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을 느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인간의 육체는 영혼이나 정신에 비해 저급한 것이며, 육체의 언어인 감각이나, 정서, 욕구는 이성에 의해 무자비하게 다스려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의 육체를 포함해서 모든 자연은 그러므로 무한히 착취하고, 마음대로 목적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상태를 변경시키고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되었다. 한마디로 자연은 원칙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따라 근본적으로 변경될 수 있는 무엇으로 되었다.

과학의 진보는 경험적 실험과 합리적인 탐구정신의 상호작용이다. 자연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인간적인 소여인가? 우리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근대는 자연을 그렇게 만들었다. 모더니즘의 수정을 위해 인간의 자연관이 바뀌어야 한다. 자연을 하나의 일관된 법칙에 지배되는 무엇으로 보는 르네상스 자연관은 인간, 사회, 역사의 운동 역시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신념으로 자연을 부단히 ‘대상화’했다. 생태계철학은 과학의 구조를 파괴하는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와 반대로 과학을 통합하는 곳에서 주어진다. 과학과 기술은 그 자체로 정신을 갖지 않는다. 그 자체로서 자기원인(causa sui)도 아니다. 그러나 현대는 인간의 조건 없는 복종에 의해 과학과 기술은 주체로 되었다. 과학은 이제 대중의 복종을 강요한다.

 

III. 과학으로서의 역사 : 비코


근대의 정신을 지적하는 표현으로 우리는 지오반니 바티스타 비코(Giovanni Battista Vico, 1668년 나폴리출생-1744)의 “Verum et factum convertuntur”, 즉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만 본다”는 문장을 들 수 있다. 이 명제는 18세기 초 비코의 새로운 학문(nova sziencia,1725)에 나오는 말로써, 자연은 무엇을 산출하는가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자연탐구의 준칙과 나중에 칸트 인식론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비코는 이 명제를 역사과학의 준칙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역사를 자연과학보다 우선하는 위치에 두고자 했다. 비코에 의하면 자연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지만, 역사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래서 진정한 과학은 역사에 의해 주어질 수 있다. 그것은 실제로 「역사만들기」와 가까이에 있다. 비코의 준칙은 그래서 인식전략 내에서 반성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대한 합리적인 재구성으로 변했고,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손에 쥐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먼저 그 사람 비코에 대해 살펴보자: 앞에서도 그랬듯이 우리는 한 철학자, 혹은 사상가의 생애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많이 말하지 말자. 어떤 사람의 생애를 빤히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의 사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보다는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는 편견을 갖기가 쉽기 때문이다. 하여간 비코는 나폴리의 감청색 바다가 아름다운 나폴리의 바닷가에서 가난한 책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정교사를 좀 하다가 독학으로 공부해서 고향의 대학교수가 된다. 가난하였지만 왕성한 학문 활동으로 많은 저작을 남겼다. 특히 서양역사학의 이론적 토대로서 헤겔, 맑스와 소렐, 몸젠, 딜타이, 크로체, 슈펭글러 등에게 큰 영향을 남겼다. 그는 확실히 시대를 초월한 사상가였다. 스스로 말하듯이 자신의 사상은 당시로서는 “막막한 사막에 배를 띄운 것과도 같은”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과 맞섰던 야곱처럼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자신의 열정을 바쳤다. 그의 책 새로운 과학은 200년이 지난 다음에 비로소 역사철학의 바이블로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은 뢰비트(Karl Löwith)—하이데거의 제자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였고, 우리나라에는 헤겔에서 니이체로라는 책으로 유명하다 보수적인 역사철학자—가 말하듯이 최초로 “보편사를 경험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역사’를 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서구의 「역사철학」, 「역사이론」의 선구적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종종 이 세사람 볼테르(Voltaire), 비코, 보쉬에(J. B. Bossuet)를 든다. 역사는 섭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섭리는 역사파악의 제 1원리이다. 여기서 섭리는 그러나 종말론적인, 신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과정속에서 신성한 섭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일이다. 그것이 곧 시민사회에 대한 설명이다. 데카르트에 반대하여 비코는 역사는 인식될 수 있다고 잘라 말한다. 인용해 보자: “고대를 포함한 역사의 시초의 그 칠흑같은 밤에도 (······) 의심의 여지가 없이 영원한 진리의 불빛은 빛나고 있으며, 이 시민사회의 세계는 분명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원리는 ‘인간정신의 다양한 변형을 통해’ 발견될 수 있고, 또 발견되어야 한다.”

비코는 인간의 본성을 물리학적 생물학적 속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간적 본성으로 파악한다. 물리적 현상학이 이니라, 정신의 현상학을 강조한다. 물리적 현상학은 자연경험으로부터 가능하지만, 정신의 현상학은 역사로 부터 가능하다. 이와 관련된 부분을 인용해 보자: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오로지 자연적 질서를 통해서만 신의 섭리를 명상해 왔다. (······) 철학자들은 아직도 인간의 본성, 즉 사회성을 그 주요한 성질로 하는 나머지 절반에—즉 역사적 세계—비추어 신의 섭리를 명상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만들어진 것에 대한 합리적인 재구성: 이것은 계몽의 준칙이다. 계몽은 출신성분과, 신의 은총과 같은 정당화원리를 파괴하고, 그 대신에 이성의 원리로 대체하는 것이다. 소유, 정의, 국가, 그리고 법, 신분상의 불평등, 출신성분 등은 그 정당성을 상실한다. 즉, 합리적으로 재구성된다. 이런 합리적인 재구성의 원형은 ‘홉스의 국가론’이다. 홉스는 인간이 공격적인 개인주의(Egoismums)에 초사회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자연 상태를 가정한다. “인간은 늑대이다(homo homini lupus)”라든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라는 말에서 자연 상태의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 한다. 이런 허구적인 자연 상태의 토대위에서 국가는 개인적인 관심을 제한하고, 개인을 길들이는 것이 정당화된다.

자연 상태의 인간을 시민적, 사회적 상태로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 가정은 로크, 루소, 몽테스키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제시된다. 이런 재구성과 사회의 이성적인 정당성을 추구함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체적인 것과 이상적이고, 이성적인 것의 대립이다. 계몽주의자들은 그래서 동시에 현재의 사회관계에 대한 비판자인 동시에 미래의 이성적인 사회를 세우는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계몽의 정치철학자는 앞으로 오게 될 혁명의 선지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계몽은 인간관계를 근본적으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계몽과 더불어 ‘인간역사’는 반성적이 된다. 이 말은 계몽과 더불어 역사 그 자체는 단순히 인간에게 일어나는 바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회조직을 위해 프로그람에 따라 엮어져야 할 과제로 되었다. 우리는 이를 <섭리의 역사>를 <자유의 역사>로 바꾸는, 이른바 구속사(救贖史)의 세속화 작업이라 말해도 좋다. 구속사로서의 인간사 역시 최후의 심판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계몽은 역사에 인간의 자유와 점진적인 해방이라는 세속적인 세계의 목표를 부여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역사이해의 종말에 와 있다. 역사가 인간에게 줄 유토피아적인 리쏘오스가 소진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류문명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금세기에 경험한 참혹한 야만으로 인해, 절망적이 되어 버렸다. 이로써 인간이 역사를 잘, 조화롭게 만듦으로써 이상적인 인간관계가 가능하리라는 믿음도, 또 인간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관계속에 세워둘 수 있으리라는 현실사회주의의 믿음도 완전히 무너졌다.

여기서 우리가 시도하는 「모더니즘의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이성은 아직 충분히 이성적으로 발현(發顯)되지 않았으며, 합리성 역시 아직 포괄적으로 적용되지 못했으며, 기술은 계속 진보하고 있으며, 인간의 자연지배는 아직 미완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인간관계’는 이 ‘기술진보’를 따라잡지 못하고, 전통적이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근대의 과학과 자연과 역사개념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의 수정을 위한 우리의 「모더니즘 프로젝트」는 필수적이며, 화급한 일임에 틀림없다. 현대의 위기를 과학과 기술과 합리성이라는 전략으로 풀어가고자 의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기술에 의한 자연과 사회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낼 때 필요로 했던 기술의 몇 십 배, 몇 천 배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현대사회는 불투명하다. 하늘이 흐려 불투명하고, 내일의 사회관계를 알 수 없어서 불투명하다.

일기예보를 예로 들자: 현재의 과학으로는 70%의 적중률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사람들이 이 정도의 적중률은 일기예보가 기상에 관해 아무런 예언도 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고 하자. 100%의 적중률을 보이는 일기예보체제를 갖추기 위해 우리는 위성의 사진촬영기술을 개선하고, 위성사진을 읽는 컴퓨터를 더욱 정밀하게 하고, 하여튼 끊임없이 보다 진보한 기술을 여기에 쏟아 부어야 한다. 근대의 정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 왔다. 모든 인간은 어차피 경험론자이고, 경험적 사실을 귀납함으로써 이런 문제해결 방식은 상당한 부분 타당한 것이며,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은 인간이 기상변화를 이용하고, 자연현상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시도하는 「모더니즘 프로젝트」는 반대로 아주 간단한 방식을 제시한다.

인간의 삶의 방식을 자연현상에 맞추어 「자연의 한계 내에서의 욕망」을 최선으로 하는 것이다. 근대는 그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현대의 불투명한 위기는 그러나 위기로 불안으로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를 기회로 근대라는 거대한 구조를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시도하는 「모더니즘 프로젝트」이다. 철학의 일은 현재의 문제를 복원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일이다. 무엇으로? 헤겔의 말로하자면 시대에 대한 개념적 파악으로. 왜냐하면 철학은 이념으로 파악된 그 시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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